진리의 상
진리의 상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우리가 상에 집착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경계해야 하는 일이라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찰나의 상을 짓지 않고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시로 우리는 스님이라고 하면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도 상사나 동료들 간의 도덕적 예의를 중시하거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친구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에 대한 기준들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상입니다. 우린 어릴 때 학교에서부터 도덕, 윤리, 종교적으로의 올바른 방향등을 지식으로 배웁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이 살아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도리를 진리라고 앞세워서 이러한 상에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마음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피우고,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배신을 하는 행위들은 당하는 자가 있고, 그 행동을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판단을 할 때는 옳고 그름의 상이 있지만 그 바람을 피우건,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배신을 하는 행위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살아온 환경과, 가족과의 처한 관계,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등의 이유로 인함 것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말한다 해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세 살짜리 아이의 입을 통해서도 진리는 설해질 수 있습니다. 정견에 기초해 있는가,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인가, 그것만이 진리를 가늠하는 기준입니다.
(본문발췌)

금강에 나오는 정견은 다양한 전통과 학파를 포함한 종교 체계로, 그 중심에는 네 진리 또는 네 참된 진리라는 핵심 개념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생의 고통은 모든 존재는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진리로, 삶의 모든 측면에서 고통과 불만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고통의 원인은 고통의 원인은 욕심, 욕망, 욕구 등으로 인식됩니다. 욕망과 결핍감이 우리를 고통의 상태로 이끄는 것이라고 불교는 설명합니다. 세 번째 고통의 멸시는 고통을 멸하거나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것에 대한 타락을 극복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칩니다. 네 번째, 고통 멸하기 위한 길은 고통의 멸결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이는 팔정도 또는 정도라고 불리는 불교의 교훈과 실천 방법을 의미합니다. 이는 올바른 이해, 생각, 말, 행동, 직업, 노력, 정신 공연 등의 교훈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네 가지 진리는 불교에서 인생의 본질과 인간의 존재와 관련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모든 존재가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교법을 제공합니다. 결국 진리는 세상에서 정해놓은 도덕적, 윤리적 혹은 법률적인 지식에 근거한 기준이 아니라 상에 집착되지 않은 진실이고, 세상사람들이 질타를 받는 행동일지라도 그 속에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이 점을 수행자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과 원
욕심과 원은 언듯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절에 가서 108배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매일 아침 지극정성으로 108배 기도를 하는 이유는 108배 기도를 하면서 건강을 바라기도 하고, 시험 합격을 원하기도 하고,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는 다양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정성껏 108배 기도를 합니다. 나의 지극한 정성이 부처님께 닿으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죠. 불교가 인도에서 전파해 오면서 현지의 다양한 유교적, 신앙적 영향을 받아서 세속적인 신앙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수행적인 불교에서 보면 후퇴한 현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세속적 영향이 없었더라면 후대에 이렇게 까지 이어지 오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 신앙을 이런 욕심을 이 허상을 쫒게 만듭니다. 부처님의 불상 부처라 생각하고, 절을 부처라 생각하고, 절의 다양한 현상을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모양이나, 소리로 부처님을 보려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이 아니라 원을 품은 사람은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하되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 실패했을 때 낙담하지 않고 다시 노력하고, 또 안되면 다른 방법으로 노력하고, 다만 그렇게 계속할 뿐입니다.
(본문발췌)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짜증이 나고 화가 날 때는 욕심을 낸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도전하고, 최선을 다할 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도전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실패에 낙담하지 않을 때는 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있을 때 노력하지 않고 108배 기도를 하거나, 보시를 하면서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입니다. 원은 108배 기도나 보시를 하는 것과 관련 없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욕심을 내고 있는지 원을 세우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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